도예가 신경균의 장안요
JANG-AN-YO by SHIN GYUNG KYUN
I NOW BARELY UNDERSTAND THE SCENT OF CLAY...
장안요 소개
ABOUT JANG-AN-YO
부산 기장에서 우리 그릇의 아름다움을 찾는 작업을 하고 있는 도예가 신경균의 ‘장안요’(長安窯)는 1960-70년대 고려다완을 재현한 것으로 잘 알려진 부친 故신정희 선생의 전통적 기법을 계승 하면서 현대적 감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작가이다. 특정한 가마에 머물지 않고 한국 남부의 산을 찾아 다니면서 새롭게 가마를 만들고 그 땅의 흙과 나무를 이용해 도자기를 제작하면서 작품의 폭을 확충해 가고 있다. 전통의 현대화와 생활 속의 아름다움을 담는 그릇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스민 작품 들은 장작가마와 나무물레를 통해 고집스럽게 만들어졌다. 빚는사람의 정신만이 머물수 있는 전통가마 안 에서 흙과 장작불의 혼들이 만드는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 이 그릇들은 자연미라는 한국적 아름다움의 절 정을 보여준다. 살가우면서 기품 있고, 실용적이면서 멋스러운 작품들은 전통의 맛이 우러나면서도 현대적인 생활에 적합한 쓰임새를 보여준다.
저는 이제 겨우 흙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Gyung Kyun Shin incorporates his own modern interpretation as he utilizes the same traditional techniques inherited from his father, famed ceramicist Jung Hee Shin, who recreated Goryeo ceramics in the 1960s and 70s. Traveling through the mountains in the southern part of Korea, Shin expands the breadth of his pieces using the clay and wood unique to the area. Enduring the heat as the clay transforms into unique masterpieces, Shin’s ceramics radiate traditional beauty with a contemporary touch as they come out of the wood-fired kiln, a true display of Korea’s natural beauty. Delicate and stylish yet practical, Gyung Kyun Shin’s ceramics is the perfect bridge between traditional art and modern living.
HIS WORK IS THAT OF RESTRAINED REFINEMENT AND FREEDOM LIKE THE CLOUD IN THE SKY...
신경균의 작품
WORKS AT JANG-AN-YO
그의 작업은 절제된 기품과 하늘의 구름처럼 자유로움에 있다...
I AM A BUSAN NATIVE, LIVING IN KOREA ON A PLANET CALLED EARTH...
작가 신경균
ARTIST : SHIN GYUNG KYUN
1964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남

Born in Jinju in South Gyeongsang Province

1978

선친 장여 故신정희의 작업장에 입문

Begin apprenticeship in his father’s workshop Shin Jung Hee (Pseudonym : Jang yeo)

1982

부산시립공예고등학교 도자기학과 졸업

Graduate Busan City Arts High School (Ceramics)

1989

부산산업대학교 예술대학 공예학과 졸업(도자기 전공)

Graduate Busan Industrial College (Bachelor of Arts in Ceramics)

1991

경상남도 기장군(現부산시 기장군) 장안에 터를 세움

uild wood kiln (Janganyo) in Jangan, Gijang, Busan, Korea

1992

동대학교 대학원 졸업 / 연구논문 <조선시대의 지방가마에 대한 소고–웅촌가마를 중심으로>

Graduate Busan Industrial College (Master of Arts in Ceramics)

Thesis: Kilns of the Joseon Dynasty Focusing on Woonchon Kilns

1994

일본 히로시마 미츠코시 <신경균의 이도다완> 개인전

Solo Exhibition Shin Gyung Kyun’s Yi-do Sabal(Tea Bowl) at Mitsukoshi in Hiroshima, Japan

200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정상회의 출품

Showcase ceramics at the Asia Pacific Economic Cooperation summit meetings

2006

대구 봉산문화회관 개인전

Solo exhibitions at Daegu Bongsan Cultural Center

서울 갤러리현대 두가헌, 갤러리 H에서 초대전 / 누미마루 에이팩(APEC)하우스 소장

Invitational exhibitions at Seoul Galleries : Gallery Hyundai Dugahun and Gallery H / Displayed at Nurimaru APEC House

2008

부산 코리아아트갤러리 개인전

Solo exhibition at Korea Art Gallery in Busan

2009

부산-후쿠오카 우정의 해 기념 장안요 신경균전

Solo exhibition for Commemorating the Year of Friendship Between Busan and

일본 후쿠오카 에르가라홀 7층 갤러리 /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 개인전 개최

Fukuoka at ELGALA Hall In Fukuoka, Japan / Exhibition at Shinsegae centum city in Busan, Korea

2014

서울 아트링크 갤러리 초대전 / 부산 파라다이스호텔 개인전

Invitational exhibition at Artlink Gallery, Seoul / Solo Exhibiton at Paradise Hotel Busan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 전시회-신경균 그릇전 / 프랑스 파리 한국문화원 초대전-신경균 그릇전

The Art of Korean Ceramic Master Shin Gyung Kyun at UNESCO Paris, France

The Art of Korean Ceramic Master Shin Gyung Kyun at Korean Culture Center in Paris, France

2015

부산문화대상-문화 예술부문 수상 / 프랑스 파리 체르누스키 박물관 소장

Busan Culture Grand Prize Recipient in Cultural Arts / Displayed at Cernuschi Museum in Paris, France

조선공예 100년만의 귀환, 장안요, 부산, 한국

Joseon traditional Handcraft 100 years reteurn, Janganyo, Busan, Korea

2017

영국 예술단체 그라이즈데일 아츠재단과 캐스필드 갤러리 영한 워크샵, 맨체스터, 영국

Grizedale Arts, Castlefield Gallery workshop, Manchester, UK

2018

<서울에 뜬 달> 조선일보미술관, 서울 / <상하이에 뜬 달> 주상하이한국문화원, 상해

Solo Exhibition at Chosunilbo Gallery in Seoul, Korea

Solo exhibition at Korean Cultural Center in Shanghai, China

2018 평창동계올림픽 VIP 리셉션장 전시, 평창

2018 PyeongChang Olympics VIP reception, Pyeongchang

상해예술박람회 윤아르떼갤러리, 상해월드엑스포전람관, 상해

Shanghai Art fair, Yoonarte gallery, Shanghai World expo Exhibition & Convention center, shanghai

2019

2019 아트마이닝 밀라노 / 2019 아트마이닝 파리

2019 ARTMINING MILANO, 2019. 4. 9-14, Palazzo Litta, Milano, Italia

2019 ARTMINING PARIS, 2019. 5. 22-26, Grand Palais, Paris, France

2019 베니스비엔날레. 퍼스널스트락쳐 <2019.5.11-11.24> 팔라죠 모라, 유럽문화센터, 베니스, 이태리

Venice Biennale 2019. Personal Structures 11 May-24 November, Palazzo Mora, Gallery 16 European Cultural Centre Venice, Italy

현재, 부산시 장안에서 작업 중

Currently working in Jangan

신경균의 장안요를 말하다
REVIEWS ON THE WORKS OF SHIN GYUNG KYUN

이어령 / 초대 문화부장관

Lee O-young /

The Former Minister of Culture, Korea

구와바라 시세이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Kuwabara Shisei /

Documentary Photographer

유홍준 / 문화비평가

Yoo Hong Jun /

Culture Critique

중광스님

Jung Kwang /

Buddhist Monk & Artist

이상일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Sang Ill Lee /

Documentary Photographer

  1. 연 혁
  2. 이어령 / 초대 문화부장관
  3. 1934
    충남 아산 출생.
    1990
    제1대 문화부 장관
    2011~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선, 형, 색 그리고 촉각의 미학 - 신경균의 도자기
나는 한중일 아시아 삼국의 도자기를 비교한 유종열의 높은 안목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중국의 도자기가 듬직한 형태미에 있고 일본의 도자기가 아기자기한 색채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청자이든 백자이든 한국의 도자기가 약간 이지러진 듯싶은 그 가냘픈 선(線)에 있다는 말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더구나 한국의 도자기가 왜 그토록 아름다운 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불규칙 가운데 규칙이 있고 미완성 가운데 완성의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에 대해서 그리고 “불규칙을 동반하지 않는 규칙은 기계에 지나지 않고 규칙을 간직하지 않는 불규칙은 문란에 지나지 않는다.”고 덧붙인 말에 대해서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일본의 많은 작품들이 “완성을 지향하고자하는 버릇 때문에 이따금 생기를 잃고 만다.”는 자기 반성의 말에 이르러서는 존경심까지 우러난다. 그러나 신경균의 도자기를 보기 전까지는 이러한 말들을 단순한 도자기 공식으로 머리에 익혀 둔 것뿐이라는 사실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도자기의 형과 색과 선이 어떠한 것인지 삼국의 도자기의 특성과 차이를 체감할 만한 기회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신경균의 도자기를 대하는 순간 한국의 도자기가 지닌 특성은 단순한 선의 예술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그 도예품에는 이른바 중국적인 형, 일본적인 색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통합된 도자기의 예술적 특성 안에서만 한국 특유의 선의 예술이 나온다는 것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한마디로 선은 형과 색과 비교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통합한 뒤에야 얻어지는 결과물이라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달 항아리의 허리를 잘라 두 동강을 낸 것 같은 커다란 백자 사발을 한 번 봐주기를 바란다. 그 묵직한 볼륨과 당당한 형태감은 중국도자기의 형을 압도한다. 동시에 신경균의 찻잔을 보라. 그 오묘한 유약의 흐름에서 배어나오는 색채감 그리고 도자기의 깔끔한 결은 일본인들의 특성이라는 색채 예술을 무색하게 한다. 두말 할 것 없이 전통적인 조선조 백자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자연스럽고 약간 이운 그 도자기의 윤곽선과 그 몸체의 실루엣은 선의 예술이 보여주는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신경균의 도자기 문화는 한국도자기는 선이 아니라 형과 색과 선의 모든 아름다움을 어우르고 통합한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떻게 한 장인의 손에서 여성적인 섬세한 아름다움과 동시에 남성적인 당당한 역동감을 함께 느낄 수 있는가. 생물이라면 아마도 양성구유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희귀한 존재감이다. 그런데 신경균의 도자기는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감상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도자기의 최종적인 미학은 바로 촉각이기 때문이다. 물레의 회전과 손의 감촉에서 태어난 둥근 흙의 형태는 새의 둥지이며 작은 하늘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손과 흙이 접촉할 때 생기는 그 이상의 부드러움도 견고함도 아니다. 달 항아리를 반쪽 낸 것 같은 백자 사발을 잡는 손은 이미 흙의 감촉이 아니라 감전이고 진동하는 교감이다. 눈으러 보고 귀로 듣는 아름다움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어떤 것을 구하기 위해 허공을 더듬던 손에 잡힌 달빛인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냥 달빛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우주의 작은 파편이다. 묵직한 중량감을 느끼면서도 도자기를 들고 있는 손은 허공에 떠 있는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천리 밖 달의 속살까지 보고 만져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리며 무중력의 백자 사발 안에 들어가 서툰 시 한 수로 화답한다. 이것은 하늘위에 뜬 흰 달이 아니다. 이제 막 산 봉우리에 올라 은하수 물을 길어 오는 백옥의 사발 정화수 보다 맑은 흙과 불의 기도 도공의 가슴이 가마(窯)가 되고 시인의 열정이 불길이 되어 천 번의 밤이 지나도 기울지 않은 달이 되었다. 청화가 파란 호수가 되고 진사가 저토록 고운 노을이 될 줄이야. 도공도 미처 몰랐던 그 많은 색깔들은 모두다 어디에 두고 교교한 달빛만이 남았느냐. 얼마나 간절한 비원이었기에 땅속에 묻어둔 천년의 침향(沈香)이 지금에서야 깨어나 저리도 향기로운가. 달 항아리가 몰래 속마음을 보여주네 백자 사발.
  1. History
  2. Lee O-young / The Former Minister of Culture
  3. 1934
    Born in Asan, Chungnam, Korea
    1990
    Became Korea’s First Minister of Culture
    2011
    A PROFESSOR EMERITUS AT EWHA WOMANS UNIVERSITY
The Art of Line, Form, and Touch – Shin Gyun Kyun’s Ceramics
I do not wish to add any comments to the sophisticated taste of Yanagi Muneyoshi, Japanese scholar of aesthetics, who had compared the ceramics of three Asian countries, Korea, China, and Japan. It is true that Chinese ceramics has a certain formative beauty of a heavy build and Japanese ceramics has charming color tones. I do not wish to deny that Korean ceramics seem to have a slightly waning delicate line whether it is celadon or white porcelain. Moreover, I would like to applaud Yanagi’s descriptions of why Korean ceramics is ever so beautiful when he writes, “There is regularity in the midst of irregularity and flow of perfection in the midst of imperfection.” He also adds, “Regularity that does not accompany irregularity is nothing but machinery and irregularity that does not cherish regularity is nothing but disorder.” There is even a part of me that respects his self-reflective comment on many Japanese works when he writes, “Due to the habit of heading toward perfection, they sometimes lose liveliness.” To be frank, however, I cannot help but confess that these words were simply memorized in my mind as a formula of ceramics until I viewed Shin Gyung Kyun’s world of ceramics. I never had a genuine opportunity to thoroughly experience the form, color and line of ceramics nor the features and differences among the ceramics of the three countries. But the moment I encountered Shin Gyung Kyun’s ceramics, I realized that the features of Korean ceramics could not be explained simply by the art of lines. Shin’s pottery included both the so-called Chinese form and Japanese color, and the unique Korean art of lines in the artistic feature of such integrated works of ceramics was palpable. In other words, I felt certain that line cannot be compared with form and color, it is the consequence obtained after all the elements have come together, integrated. Most of all, I would like to invite you to view the huge white porcelain bowl which looks like a moon jar cut in half. The weighty volume and dignified sense of form surpass the Chinese form of ceramics. Now, take a look at his tea cups. The sense of color that permeates from the mystic flow of the glaze and the clean texture render the Japanese feature of color-oriented art rather insignificant. The traditional characteristics of Chosun white porcelain definitely come to life true to the original contour of the pottery with a natural wane and the silhouette of the body displaying the extreme art of lines. Shin Gyung Kyun’s ceramics show us that Korean ceramics is not about just the lines but the embodiment of all the beauties of form, color and lines, that is, the synthesis within. How could feminine beauty of subtleness and masculine spirit of dynamic pride both spring from a single artisan’s hand? It comes from the rare existence of androgynous talent. However, one cannot fully appreciate Shin’s ceramics simply by viewing it because the ultimate aesthetics of ceramics lies in the sense of touch. Born from the turning potter’s wheel and the tactile sensation of the hand, the clay takes the form of the round earth and the bird’s nest and the sky held within. It is not simply the softness and hardness formed when the hand and clay make contact. The hand that molds the white porcelain bowl is not merely touching the clay. It is the communion of electric energy and vibration from the hand. As the moonlight fumbles around in the void, it is caught by the artisan’s hand to pursue something more than just beauty obtained by sight and sound. To be precise, it is not just any moonlight but a small piece of the cosmos landing from the sky. While feeling the weightiness, the bowl also feels as light as a feather floating in the air in the hand holding it. I truly feel lucky to have had the opportunity to see and touch the inner skin of the faraway moon, and here my humble poem follows, which sprang from my deep appreciation for the delicate white porcelain bowl. White moon high in the sky, this is not. Just now, arriving at the peak of a mountain The white jade bowl fetching water from the galaxy The prayer of earth and fire, purer than freshly drawn water The potter’s chest becomes the kiln The poet’s passion becomes the flames A thousand nights and the moon stayed full, through the nights Who could have known, cobalt becoming a blue lake and copper-red becoming a sunset so elegant a glow. Those many colors even the potter didn’t notice Where have they all gone to leave the soft moonlight alone. How earnest a wish could it have been The agarwood buried in the earth for a thousand years to be so heavenly fragrant, only now awake The moon jar reveals its deep heart in secret White porcelain bowl. Autumn 2010 Lee O-Young Korea’s First Culture Minister (Former Culture Minister)
  1. 연 혁
  2. 구와바라 시세이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3. 1936
    일본 시마네현 출생.
    1963
    일본 사진비평가협회 신인상 수상
    1964
    한국 취재 시작
    2014~
    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활동 중.
선대를 능가했는가, 도공 신경균
내가 처음 신경균을 만난것은 1972년 10월 22일로 그가 아직 아홉살때 였던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흘전인 10월 19일 나는 문경읍을 방문하고 있었다. 한국 도예사에서 그 모습이 사라진 이조 초기의 잡기(분청사기)의 재현을 시도하고있는 도공들을 취재하기 위해서 경균군의 아버지 신정희씨를 만나고 있었다. 문경읍의 중심부에서 얼마 멀지않은 진안리에 신정희씨들 3명의 도공들이 재현작업을 하고있는 조령요가 있었다. 이미 여러번 소성을 시도하면서 그런대로의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촬영일정에 맞추어 10월 20일 저녁부터 소성이 시작되어 등요에 장작불을 집히고 9시간 이상 끊임없이 불을 땐후 심야 3시가 넘어서야 불을 끄게됐다. 그후 6시간 정도 가마를 냉각시킨후 다음날 아침에 가마를 열었다. 그때 요출(가마다시)된 도기의 출현이야말로 400여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그때 촬영한 사진을 일본의 월간잡지 『세계화보』에「‘환상의차기’를소생시킨 한국의 도공」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것이 신정희의 일본에서의 첫 등장이다. 고려의 청자, 이조의 백자라고 시대에 따라 분류되는 도예사의 변천기 사이에 소성된 잡기가 분청사기이다. 농민이나 일반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이들 사발이 일본의 다도인(茶人)들에게는 ‘소박’또는 ‘아취’의 상징으로서 높히 숭상받게 된것이다. 이렇게 다시 살아난 400여년전의 작품으로서 이도, 깅까이, 웅천(고모가이), 하케메,미시마, 이라보, 계룡산등의 도기가 재현되었다. 그때 일본에서 페리선으로 가지고간 내 자동차 뒷 트렁크에 막 가마다시한 도기를 싣고 부산의 신정희씨 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아들 경균군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것이다. 그후 선대의 조령요는 통도사에 가까운 지산리에 지어져 자리를 잡게되고 나는 한국을 방문할때마다 자주 들리게 되었다. 경균군이 중학생때 부터 도방에서 녹로를 돌리는 작업을 습득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과묵한 소년 경균군은 묵묵히 흙을 손에 쥐고 돌리며 마치 흙과 벗을 삼아 놀며 장난치는듯이 보였던 기억이 난다. 언제였든가, 그가 육군에 징병되어 있을 무렵일것으로 기억하는데 경균군이 도자기를 넣는 오동나무 상자에서 고급스런 사진기 니콘카메라와 렌즈를 꺼내며 나에게 보여준 일이 있다. 군대에서 사진반에 배속되어 있었던 관계인지 사진가로서의 내 직업에 엷은 관심을 품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때 아버지가 「이 애는 중이 되고 싶다 한다네」라고 크게 웃으며 말해 준것을 기억한다. 통도사의 승려들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테니 직업을 선택하는데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것이다. 그 이후 경균군이 기장군에 장안요를 열고나서는 내가 그를 만날 기회가 없었으나 약 20년이란 세월이 지난 올 6월에 해운대의 사진미술관에서 개최된 나의 사진전에 부인을 동반하고 찾아와 주었다. 대범한 성격이 큰 그릇으로 성장시킨것이구나 하고 바로 느낄 수있었다. 금년 여름 기장의 장안요를 찾은 나는 전시장의 작품들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가을 내가 그를 처음 만난고 37년을 지난 그때의 소년이 훌륭한 도예작가로 대성해 있는 모습에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선대 신정희가 지니고 있는 유전자가 이 아들에게 맥맥히 흐르고 있다는것을 바로 알아 차릴 수가 있었다. 어쩌면 선대의 역량을 이미 능가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르겠다. 이번에 신경균씨의 작도전을 위한 작품제작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나는 등요가 있는 전라남도 고흥읍을 방문하여 작품이 소성되기 까지의 모든 과정을 3일간에 걸쳐 카메라에 담았다. 힘차게 녹로를 돌리는 유려한 미기와 유약을 칠하는 섬세한 작업을 찍으면서 그의 숙달된 손길에서 무수한 작품이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되었다. 불타는 정열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작도에 몰두하고있는 그의 모습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참 아름답다고 느끼며 셧터를 눌렀다.
  1. History
  2. Kuwabara Shisei
    / Documentary Photographer
  3. 1936
    Born in Shimane Prefecture, Japan
    1963
    Received Japan Photo Critics Association
    Award
    1964
    Began reporting on Korea
    2014~
    work as a photojournalist.
Ceramicist Gyung Kyun Shin – Beyond His Father’s Legacy
I first met Gyung Kyun Shin on October 22, 1972, three days after I arrived in Mungyeong, when he was just a nine-year old boy. I was in Korea working on a story about Korean ceramicists attempting to recreate the ceramics that disappeared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refore, I was meeting with Gyung Kyun’s father, Jung Hee Shin. Joryungyo, the kiln site where he was working with three other ceramicists was not far from the center of Mungyeong. They had already made several attempts and it seemed as though they were making progress. To meet my schedule, Gyung Kyun’s father began firing on October 20. After nine hours of continual firing the kiln was ready to be cooled. It was after 3:00am. The kiln was opened the next morning, and when the first piece was taken out, it was the moment when the 400 hundred-year gap in history was overcome and the past had come alive. The headline in the magazine ran, “Korean Ceramicist Brings ‘Dream Tea Set’ to Life”. This was Jung Hee Shin’s first introduction to Japan. The ceramics that come between the green celadon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 white porcelain of the Joseon Dynasty is the powdered celadon. This type of ceramics, traditionally used by farmers and the working class represented simplicity and elegance. As a result, they were highly regarded by many involved in tea ceremonies. Numerous different types of powdered celadon glazes that existed 400 years ago were re-created. On my return to Korea, the trunk of my car was full of the ceramics I took with me to Japan after Jung Hee Shin’s first successful re-creation. I headed straight to his house. That is when I first met his son, Gyung Kyun. Soon after my visit, Gyung Kyun’s father built a kiln near Tongdo Temple and every time I visited Korea, I always stopped by. I saw Gyung Kyun trying to master the potter’s wheel since he was in junior high school. A reserved boy, I remember Gyung Kyun quietly and playfully working the clay in his hands as if it was a friend. And if I recall correctly, Gyung Kyun was serving in the army when he pulled out a Nikon camera and lens from an elegant wooden box originally made for ceramics. He was in the photography unit on his base and it seemed that he had a slight interest in my profession. At that time, his father laughed aloud and said, “This kid wants to be a monk.” Living near one of the largest temples in Korea and being constantly around Buddhist priests, it was natural for him to question his future career path. After, Gyung Kyun opened his own kiln, Janganyo, in Gijang, there were not many opportunities for me to see him. However, last June, after about 20 years, Gyung Kyun and his wife came to my exhibit in Haeundae, Korea. I sensed that his open-minded personality had led him to become a great individual. This past summer, I visited Janganyo and saw his ceramics for myself and was very surprised. The boy I met 37 years ago in 1972, had come of age as a successful ceramicist, and I could not help but be very moved. I could feel that his father’s genes were definitely flowing through every part of his being. It would not be an overstatement to say that he has gone beyond and surpassed his father’s ability and talent. I visited Gyung Kyun’s kiln in Goheung to document his ceramics-making process in preparation for his upcoming exhibit. I spent three days taking pictures of him at every stage – from kneading the clay to forming his pieces, all the way to just before firing the kiln. As I watched him turn the potter’s wheel with brilliant yet elegant force and his meticulous attention to detail as he glazed his pieces with his experienced hands, I realized that countless masterpieces were being born at his fingertips. Mesmerized by his burning passion and focusing all his being into his work, I thought what a beautiful person this was before me as I snapped my camera.
  1. 연 혁
  2. 유홍준 / 문화비평가
  3. 1949
    서울 출생.
    2004
    제3대 문화재청 청장
    2018 ~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살결 같은 질감, 그리고 넉넉한 푼주의 세계 - 내가 본 신경균과 그의 도예
그와의 첫 만남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고 있을 때 전라남도 고흥반도의 안동이라는 곳에서 고분 발굴이 있었다. 현장 확인 차 내려간 김에 나는 운대리의 고인돌과 분청사기 가마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둘러보았다. 솔밭 속에 무리지어 있는 운대리의 고인돌은 여전히 예스러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분청사기 가마터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년 쯤 전에 당시 전남대 교수였던 이태호와 이곳에 왔을 때는 논둑이 온통 분청사기 도편으로 되어 있었다. 주로 깨진 백토분청 대접으로 이른바 일본인들이 상찬해 마지않는 ‘호죠 고비끼(寶城 粉引)’ 다완(茶碗) 도편도 보였다. 16세기에 이곳 운대리에서 제작된 백토분청사기는 보성에서 일본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일대가 중요한 미술사 유적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엔 사금파리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군청 문화재 담당자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10여 년 전부터 일본인들이 도요지탐방이라는 테마관광으로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다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는가. 하도 허망하여 빈 하늘만 처다 보고 있는데 웬 사내가 나타나 짙은 경상도 사투리로 “저 산속엔 아직 사람 손 타지 않은 도편이 층층이 묻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저는 신경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릇을 굽고 있습니다.”라며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서둘러 그의 안내를 받아 도편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가 산비탈 얼마만큼 가서 손으로 흙을 파헤치니 분청 도편들이 켜켜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놀랍고 반가와 이런 곳이 얼마나 되냐고 묻자 그는 이 산 곳곳에 펴져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도예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담당자도 알지 못하는 것을 한 도예가가 문화재 지표조사까지 대신해준 셈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차를 타려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제 가마입니다”라며 은근히 방문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한번 들려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나중에 기회 있으면 들려보겠다고 사양했다. 이제 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신경균이 누구인지 몰랐고, 혹 내가 방문했다는 것을 가마 선전에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있었다. 그 대신 예의상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어쩌다 경상도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그릇을 굽습니까?” “여기 흙이 조아예(좋아요).” “주로 분청 작업을 합니까?” “분청도 해고 백자도 해고, 해고 싶은 대로 헙니더.” “그러면 주로 다완을 만듭니까?” “다완도 해고 자배기도 만들고, 해고 싶은 대로 헙니다.” 대답이 범상치 않았다. 나의 상투적인 질문이 못마땅한 것이 분명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선 참으로 개성 있는 도예가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차를 타려는데 그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더하는 것이었다. “청장님예, 도예가 신정희(申正熙) 선생을 아능교?” “아다마다. 뵌 일은 없지만 다완에서 일인자라고들 하지요.” “제가 그 분의 셋째 (아들)입니다.” “아, 그렇군요.” 지금 와 생각하니 그는 내가 한동안 미술평론을 했기 때문에 혹 신경균이라는 도예가의 이름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고, 전혀 모르는 것 같으니까 마지못해 아버지 이름을 대고 자신을 기억시켜 주었던 것 같다. 사실 그 때 나는 이 가마터를 어떻게 해야 보존할 수 있을까에만 신경이 곤두섰을 뿐 그 도예가의 작업에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곧바로 사적국장에게 지시해서 운대리 가마터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는 작업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운대리 가마터는 땅 주인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곧바로 지정하지는 못하고, 그 대신 이듬해부터 국가가 토지를 매입해 사적으로 지정하는 방침을 세웠는데 지금도 잘 진행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작가와 평론의 관계 이후 내가 신경균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때였다. 각국 정상들을 초대한 만찬에 그의 그릇을 사용하고, 회담장 한쪽에 4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마 장안요에서 정상 영부인들의 도자체험도 열렸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 때 청와대의 의전이 이렇게 발전했다고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평소 문화외교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몇 해 전 덴마크 여왕이 방한했을 때 하이얏트 호텔에서 열린 만찬에서 사용한 그릇은 전부 로얄 코펜하겐을 본국에서 수송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작 신경균의 도예작품을 처음으로 본 것은 2006년 서울 갤러리현대 두가헌에서 열린 그의 초대전 때였다. 특별히 신경 써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색깔의 생활자기와 큼직한 푼주에서는 현대적인 멋도 있고, 특히 질감이 따듯하여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전시장에서 갤러리현대 박명자 사장과 얘기를 나누게 되어 내 소감을 말하자, 박사장은 “진짜로 장작 가마로 구어서 이런 맛이 나와요.”라며 그의 그릇 하나를 매만져 보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신경균의 이력을 보니 그는 이미 다섯 차례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도예계의 어엿한 중견작가였다. 그는 작업의 본거지인 부산에서만 3번, 대구와 서울에서도 한차례씩 초대를 받았으니 도예가로서 나름대로 위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안요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그의 도예작품과 생활 자기들을 좋아하는 애호가도 적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도예에 대한 세평과는 달리 신경균의 도예 세계를 말해주는 본격적인 평론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의아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장안요의 신경균은 알아도 그의 도예 세계가 갖고 있는 예술적 특징과 가치를 명확하게 집어서 말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신경균 자신이 스스로의 도예에 대한 술회한 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기꺼워하지 않는 듯했고, 어쩌다 등장한 경우에도 자신의 도자기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도예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곤 했다. 그것도 “예술은 단순한 것 아니겠냐”느니, “예술은 인생 그 자체”라느니, “나는 그저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라는 등 선문답 같은 얘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사실 예술적 특질을 말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평론가의 일이다. 평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예술적 평가를 내리는 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이보다도 더 중요한 또 다른 기능이 있다. 그것은 작가와 관객의 중간에서 한편으로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대변해 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관객 입장에서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예술적 방향에 대해 주문하기도 하는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예술가에게는 좋은 평론가가 가까이 있어 그 작업의 처음과 끝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경균 주위에는 그런 평론가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아내 임계화 씨가 충분히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 역할을 여기서 수행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신경균의 도예에 관한 한 한 사람의 관객일 뿐이다. 두가헌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를 한차례 본 적이 있고,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장안요를 잠시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지금은 평론가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도 없고, 도예평론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신경균의 도예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은 관객은 관객이로되 한 때 미술비평을 해온 안목에서 내가 느낀 바를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혹 작가와 관객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촉매 역할은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우리 도예계는 오랫동안 이른바 ‘전승도예’와 ‘현대도예’로 나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 도예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이분법적인 분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른바 전승도예란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를 재현하듯이 제작하는 것을 말하고, 현대도예란 현대미술로서 도자예술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대개 미술대학 도예과 교수들이 자신들의 작업이 갖고 있는 예술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혐의가 있다. 심지어 전승도예가는 도예가가 아니라 도공으로 부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전승도예가 이렇게 폄하된 데에는 전승도예 측의 잘못도 없지 않다. 도예란 다른 모든 공예와 마찬가지로 기술과 예술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도자기를 굽는 기술 그것만 강조한다면 도공일 뿐이다. 백자의 김익영이나 분청의 윤광조처럼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적 도예를 지향했다면 그런 폄하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신경균의 도예는 전승도예인가, 현대도예인가. 그가 추구하는 기법은 백자와 분청사기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나타난 형태는 이른바 현대도예의 모습이다. 그는 나이 15살 때부터 선친 신정희로부터 전승도예의 기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현대도예의 훈련을 쌓았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전승이니 현대니 하는 분류가 필요 없는 도예의 길을 걸은 셈이다. 이것이 그의 큰 강점인 것이다. 신경균은 이처럼 전통에서 출발하였지만 지향하는 것은 현대도예이다. 백자라도 조선시대 백자와는 다른 우리 시대의 백자, 분청이라도 우리 시대의 분청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백자는 기본적으로 고령토(高嶺土;kaolin)이라는 백토(白土)로 만든다. 백토에는 철분(Fe)이 없다. 만약에 철분이 0.1%라도 있으면 흰색이 나오지 않는다. 철분이 불에 녹으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황색으로 녹색으로 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른바 산화제2철(Fe2O3)의 산화염에서는 노랗게 되는 황변(黃變)현상이 일어나고, 산화제1철(FeO)의 환원염에서는 초록색으로 변하는 녹변(綠變)현상이 일어난다. 신경균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미량의 철분이 들어 있는 백토를 사용하여 노란빛이 감돌거나 은은한 연두빛이 감도는 백자를 만들어내곤 한다. 전승도예가들은 철저하게 철분이 빠진 백토를 사용할 때 신강균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백자의 진폭을 넓히며 현대 백자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분청의 경우, 우리 도자사(陶磁史)는 상감분청, 박지분청, 조화분청, 귀얄분청, 철화분청, 분장분청 등 문양을 나타낸 기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분청사기 바탕의 색감을 보면 녹색, 갈색, 검정색, 회색 등 갖가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분청의 태토로 사용하는 점토의 성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경균은 또 이 점을 이용하여 여러 다양한 점토를 시험하면서 그가 즐겨 만들어내는 초록빛, 겨자빛, 올리브빛, 카키빛, 쵸콜릿 빛 등 여러 색깔의 도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현대도예에서 이른바 색도(色陶)라고 하는 것에서 추구하는 색상을 모두 다 구사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기재료학이라고 하는 요업공학에서 나온 화공약품을 사용하여 그 색깔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통도자의 유약 제작 방식으로 천연 유약을 만들어 쓰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도자기 유약처럼 장석(長石)과 나무재를 사용하고, 때로는 옹기 질그릇 유약처럼 약토와 나무재로 유약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나무재도 소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지푸라기 등 다양하다. 이런 식으로 신경균은 전통 기법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도예로서의 표현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신경균 도예의 매력: 따뜻한 질감과 자연의 빛깔 도예는 기본적으로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다. 신경균이 전통 기법에 기초한 새로운 표현 기술을 체득했다는 것은 어떤 예술적인 지향점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필요조건의 충족일 뿐이다. 그러면 신경균은 자신이 체득한 기법으로 어떤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고 있는가, 이것이 그의 도예가 지닌 특징과 매력의 요체인 것이다. 나는 신경균의 도예가 갖고 있는 첫 번째 자랑은 질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경균의 도자에는 사람의 살결 같은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럽고 따뜻한 질감이 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주관적 평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그의 가장 큰 특질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신경균이 초대받은 바 있는 갤러리현대에서는 신경균전 바로 앞에 재독(在獨) 도예가 이영재 씨의 도예전이 있었다. 이영재 씨는 독일에서도 도예가로 높은 명성을 갖고 있고 그 분이 만들어낸 쑥색, 진갈색, 옥색 등 6가지의 빛깔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고 현대 디자인적인 색감이라고 칭송할 만한 것이다. 모던하고 세련된 질감이라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질감은 매우 차가운 것이었다. 이에 반해 신경균의 도자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구수하며 언어로 치면 어눌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영재가 유럽풍이라면 신경균은 한국적인 느낌을 준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색도(色陶)라도 질감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왜 이런 질감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영재는 가스 가마를 사용하고 신경균은 장작 가마를 이용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한쪽은 기계적이고 한쪽은 자연적인 것이다. 신경균이 장작 가마를 고수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전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작 가마가 아니면 이렇게 따뜻한 질감을 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질감의 도자, 이것은 사실 우리나라 전통도예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기도 하다. 신경균 도예의 두 번 째 특징은 색감이다. 그는 참으로 여러 가지 색깔의 도예 작품을 선보였다, 그만큼 표현 기량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 신경균의 빛깔이라고 하면 역시 초록빛과 짙은 갈색이 아닐까 생각된다. 같은 초록이라도 짙고 옅음, 밝고 어두움에 따라 여러 변화가 있어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나는 자연 속의 풀빛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갈색도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 속의 흙색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신경균의 초록빛 그릇과 갈색 그릇은 마치 풀과 흙이 어울리듯 좋은 대비와 조화를 이룬다. 나는 신경균이 이 천연스런 풀 빛깔과 흙 빛깔을 좀 더 진지하게 밀고 가기를 희망한다. 그에게 DIS 칼라 챠트를 놓고 색감을 연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흙색이라도 때로는 기름진 검붉은 흙색, 남도의 주황빛 황토, 강변의 보드라운 모래 빛 같은 흙색이길 바란다. 같은 풀 빛깔의 초록이라도 그가 한 때 가마를 운영했던 경주 황룡계곡의 눈부신 신록 빛이나 한 여름 그가 살고 있는 동네 장안사에서 척판암으로 오르는 산길의 어두운 듯 가라앉은 초록빛 따위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유약을 칠하고 장작불을 지피면 그가 추구하는 자연의 빛깔은 더욱 다양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뉴욕에 있던 수화 김환기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같은 작품에 무수한 점을 찍으면서 실험미술가처럼 캔버스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뻐꾸기 소리, 갯벌소리를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는 그런 창작 자세 같은 것을 말이다. 신경균 도자의 빛깔은 그것이 풀빛이든 흙빛이든 한 그릇 안에서 색채의 미묘한 변주를 이룬다. 같은 그릇 안에서도 짙고 옅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차갑다거나 팽팽한 긴장을 유발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오직 장작가마에서만 나타낼 수 있는 우연적이지만 필연적인 색채의 변화다. 사람에 따라 이런 변주를 좋아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단일 톤으로 말끔하게 나타내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따뜻하고 자연스런 변주는 기계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생리를 따르는 자만이 나타낼 수 있는 맛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이런 맛을 좋아한다. 나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무리 압력솥이 뛰어나도 장작불로 무쇠 솥에서 해낸 밥맛을 따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예가 너무 옛날 식 비유라 이해하기 어렵다면 전자 랜지로 찌어낸 고구마가 드럼통을 개조하여 장작으로 구어낸 군고구마 맛을 당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공한 우유가 아니라 무균질(無均質) 우유가 더 고소하고 맛있는 것과 같다. 넉넉하고 듬직한 푼주 신경균의 도예 세계를 논하려면 아직도 문양(紋樣)과 기형(器形)의 문제가 남아 있다. 도예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빛깔, 질감, 문양, 기형 등 4가지로 요약된다. 그중 신경균 도예에서 문양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지금껏 신경균은 성심으로 여기에 마음 쓴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색감의 미묘한 변화를 자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무늬가 오히려 방해될 수 있어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무늬를 넣지 않는 무지(無地)가 그의 무늬 개념일 수 있다. 그의 기형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경균은 못 만드는 기형도 없고, 안 만들어 본 기형도 없다. 그러나 신경균 도예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푼주, 그의 말로 자배기일 것이다. 넓적하고 푸짐하고, 듬직하고, 넉넉한 맛을 주는 푼주는 그의 따뜻한 질감, 풀빛과 흙빛의 색감과도 잘 어울린다. 더욱이 푼주라는 기형은 신경균의 성격이나 기질, 그리고 예술적 창작 자세와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신경균 도예의 특성을 푼주에서 보고 있다. 신경균의 푼주는 다른 도예가의 그것과 달리 면 처리에 변화가 많다. 그의 도자 색깔에 변주가 많듯이 면 처리에 미묘한 굴곡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억지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기계 물레가 아니라 나무 물레를 사용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 효과를 위하여 그는 불편한 나무물레를 고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한 도예연구가(지금 그 이름을 잊었다)가 우리나라 도자기의 천연스러움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다. 그가 시골 어느 가마에 가서 물레를 돌리는 사람에게 주인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그 도공은 물레를 쉬지 않고 돌리면서 턱으로 안쪽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나무 물레가 뒤뚱거리며 돌아가는데 그 리듬에 맞추어 돌리는 것을 보고 “바로 저것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좌우 균형을 맞추어 성형해 놓고 자연스런 맛을 내기 위해 변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스러움에 내맞기는 마음에서 천연스럽고 편안함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것이 한국 도자의 비밀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경균의 나무 물레는 유약에서 장작 가마 효과와 같은 것이다. 신경균의 푼주는 그의 다른 기형과도 잘 어울린다. 푼주 옆에는 병이 있어도 좋고, 주전자가 있어도 좋고 추상적인 오브제가 있어도 좋다. 그것은 푼주라는 기형이 갖고 있는 특성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 정원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으면 다른 꽃나무들이 잘 어울리는 것과 같고, 백자의 세계에서 달항아리가 다른 기형을 품어 주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백자 달항아리의 넉넉함은 잘 알아도 푼주의 그 멋과 맛은 깊이 인식하지 못해온 점이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릇의 기본은 발(鉢), 이른바 대접이다. 이 대접이 있어야 생활용기가 충족된다. 이 대접이 크고, 작고, 둥글게, 네모나게 변형되면서 여러 기형으로 발전하는데 그것이 가장 크고 듬직하게 발전한 형태가 바로 푼주인 것이다. 많은 도예가 들이 이 푼주를 만들었지만 신경균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고, 어느 누구 못지않은 자기만의 푼주를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는 푼주의 도예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의 푼주는 백색이든 풀빛이든 흙빛이든 형태는 넉넉하고 듬직하며 질감은 따뜻하다. 그래서 누가 내게 그의 도예를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따뜻한 질감, 그리고 넉넉한 푼주의 세계’라고 답할 것이다.
  1. History
  2. Yoo Hong Jun / Culture Critic
  3. 1949
    Born in Seoul Korea.
    2004
    Served as Cultural Heritage Association President
    2018 ~
    Named Endowed Chair Professor of Myongji University Department of Art History
The Warm and Abundant World of Bowls - A Personal View on the Ceramics of Gyung Kyun Shin
First Meeting Four or five years ago when I was serving as th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or, there was an excavation of an ancient tomb on the Goheung peninsula in South Jolla Province. I went down to this southern most tip of Korea for an onsite visit. While I was down there, I decided to look around the Buncheong kiln and dolmen sites in Woondaeri. Bucheong is pottery decorated with white slip and covered with a pale bluish-green glaze. The sight of the dolmen gathered together in the midst of pine of trees was a scene out of ancient times. However, when I arrived at the kiln sites, I could not believe my eyes. When I went there 20 years ago with then Jeon Nam University professor Taeho Lee, the fields were filled with Buncheong fragments. They were mostly from white clay Buncheong bowls, the ones highly regarded by the Japanese. In the 16th century, white clay Buncheong was produced in Woondaeri and transported to Japan through Boseong. That is how I knew that this area was a very important ruin in Korean art history. But as I stood there, there was not a single shard left. I asked the local cultural heritage personnel what had happened, and he said that from about ten years ago Japanese tourists came in waves as a part of ceramics and kiln site exploration tours. And soon after that began, all the shards disappeared. I just could not believe it. I was in such shock and loss that I stood there staring up at the sky. As I stood there, a man approached me and said, “There are untouched layers upon layers of fragments in that mountain,” pointing to the mountain in front of us. Then he introduced himself and said, “My name is Gyung Kyun Shin. I make ceramics here.” I hurriedly followed him to the place he was talking about. After we traveled a certain distance into the mountain, he stopped and dug into the earth with his bare hands. There, as he had said, were layers of Buncheong fragments. Surprised and elated, I asked him how many more similar places there were. And he said that they were spread out throughout the mountain. I sincerely thanked this ceramicist. He knew something that even the local official in charge did not know. He had done the cultural heritage investigation for us. As I was getting in my car, he pointed to an area and said that it was where his kiln was. It seemed that he wanted me to visit it. I thought about visiting for a moment but then decided to decline his invitation for another time. Now that I think of it, I declined because I did not know who Gyung Kyun Shin was, and I did not want him to use my visit as a marketing tool for his kiln. Instead, out of politeness, I asked him a few questions. “How does a man from Gyeongsang Province come all the way here to make ceramics?” “The clay here is good.” “Do you usually make Buncheong ceramics?” “I make Buncheong, white porcelain… I make what I want.” “Then do you mostly make tea bowls?” “I make tea bowls, large round bowls… I make what I want.” His answers were not ordinary. It was evident that he did not appreciate my superficial questions. I could sense his individuality from the way he spoke. As I was getting into the car, he approached me and in a low voice, said one more thing. “Administrator, you know ceramicist Jung Hee Shin, don’t you?” “Of course, I do. He is the leader in making tea bowls.” “I am his son.” “Is that so.” In hindsight, Shin probably told me his name in the hopes that I would recognize it since at the time was I writing many art reviews. But when I did not, he reluctantly told me his father’s name so that I would remember him in the future. When I met Shin, I was actually only concerned about how I would restore the kiln site. I did not have the time to think of a ceramicist’s work. As soon as I got in the car, I called the historic landmark director and had him start the process of designating Woondaeri a national historic landmark. (Thereafter, we could not obtain the agreement Woondaeri landowners so it could not be designated as a landmark. In order to circumvent this, the government tried to purchase the land but I have not been able to check on its progress.) The Artist and the Critic I heard Gyung Kyun Shin’s name once again in 2005 during the APEC summit meeting held in Busan. His ceramics were used to serve heads of state and some 40 of his works were displayed throughout the meeting halls. Not only that, I read an article that his kiln and workshop, Janganyo, was designated as a cultural visitation site for first ladies during the meetings. I was excited to see how much the Korean government’s protocol office had developed in terms of cultural foreign affairs. I always felt that this was the way it should be done. (A few years ago, all the chinaware used during the Dutch queen’s visit to Korea was Royal Copenhagen, brought in from Denmark.) However, the first time I saw Shin’s ceramics pieces was in 2006 during his exhibit at Gallery Hyundai’s Dugahun in Seoul. I did not look very critically but I felt that the varied colors of his everyday pottery and the large bowls had a modern style to them. I especially had a good feeling as I felt the warmth of his pieces. As always, I told the president of Gallery Hyundai my thoughts about Shin’s ceramics. She told me that his ceramics had this warmth because they come from a wood fire kiln. I took this opportunity to learn more about Shin’s experience. I learned that he had already had five exhibits and he was not new in the world of ceramics. He had three exhibits in Busan, his hometown, and one in Daegu and Seoul each. So as a ceramicist, he had already secured a position. Janganyo was already relatively well known for its ceramics and everyday pottery – enough to have a steady following. Nonetheless, there was never a real critique or review of Shin’s work. Therefore, many people knew of Shin as the person behind Janganyo but it was difficult to pinpoint the artistic characteristics and value of his ceramics. And it was not like Shin had written about his ceramics, either. He does not like to be interviewed by the media and when he does give an interview, he talks about his life as a ceramicist rather than about his work. And even then, he would say things like, “Art is simple,” or “Art is life itself,” or “I just want to be free.” It is actually not the artist’s responsibility to talk about the characteristics of his work. It is the critic’s responsibility. Most people think of a critique or review as an evaluation, but it has a more important role than this. The critic is the link between the artist and the audience – sometimes speaking on the side of the artist and sometimes asking questions from the side of the audience. Therefore, for an artist, it is ideal to have such a person close by from start to finish. But Shin has not had anyone around him to critique his work. (I later found out that his wife was more than adequately plays this role.) It is not to say that I will take on this role. I am a part of the audience. I saw his works at Dugahun and then visited Janganyo to see his works there. I was once an art critic but now I do not live that life and am in no way a ceramics expert. But I am publicly writing what I felt about Shin’s work in the hopes that I may be a catalyst to narrowing the gap between the artist and the audience. A Modern Development on Traditional Technique Korean ceramics is divided into traditional and modern ceramics. However, I feel that in order for Korean ceramics to develop further, we must be free from this division. Traditional ceramics are the green celadon of the Goryeo Dynasty and the Buncheong and white porcelain of the Joseon Dynasty. Modern ceramics are modern art expressed in the form of ceramics. Some charge that university art professors created this division in order to emphasize their area of study. Some even say that those in traditional ceramics are not ceramic artists but just mere potters. One cannot say that traditional ceramics is completely faultless for this bias. Ceramics is just like other crafts in that artistic value must blend in with technique. If one focuses on the technique of firing, then he is just a potter. Traditional ceramicists would not have experienced this insult if they had embraced modern ceramics while staying grounded in traditional ceramics like Yik Yung Kim, known for his white porcelain, and Kwang Cho Yoon, known for his Buncheong. Then is Gyung Kyun Shin a traditional ceramicist or a modern ceramicist? His techniques are those used in making white porcelain and Buncheong. However, if you take a look at the forms of his ceramics, they follow a modern technique. When he was fifteen years old, he began his apprenticeship in traditional ceramics under his father, Master Ceramicist Jung Hee Shin. Then in high school, he built his experience in modern ceramics. So for him, there really was no need to make a differentiation between traditional or modern ceramics. This is his great strength. Shin began in tradition but his inclinations are for modern ceramics. He continuously tests clay to see how he can recreate the white porcelain and Buncheong of the Joseon Dynasty for our generation. For example, white porcelain is made from white clay called kaolin. There is no iron in this white clay. If there is even just 0.1% iron present in the clay, the ceramics will not be white. The fire causes a chemical reaction with the iron so the ceramics have a slight yellow or green tint. Iron oxide will cause the pieces to be yellow while ferric oxide will cause it to be green. Shin uses this property to his advantage to create white porcelain with a subtle hint of yellow or green. Traditional ceramicists insist on using white clay that is totally free of iron but Shin expands the scope of white porcelain and is clearly on his way to redefining it. There are many ways to express designs in Buncheong - through inlay, flowers, brush paint, design with iron glaze, white slip, etc. However, if you look at the base glaze of Buncheong, they are usually green, brown, black, or gray. The color depends on the type of clay that is used. Shin uses the different characteristics of clay to create new colors such as green, mustard, olive green, khaki, and chocolate. Shin creates all the colors in what they call in modern ceramics chromaticity. But there is an important difference here. He does not use any chemicals in his glazes to create these colors. He uses the glaze making techniques of traditional ceramics to make his glazes. Therefore, all his glazes are natural. Sometimes they are made from feldspar and wood ash or from leaf compost. His wood ash glazes are made from pine, oak, elm, or straw. It is in this way Shin is keeping his foundations rooted in traditional techniques while expanding his expression into modern ceramics. The Appeal of Gyung Kyun Shin’s Ceramics – Warmth and Natural Colors Ceramics is based on a mixture of art and technique. The fact that Shin has found a new technique to express his work while staying true to tradition means that he has fulfilled an artistic direction. The way in which Shin uses these techniques to express beauty is the appeal of his ceramics. I think that the first appeal of Shin’s ceramics is texture. His ceramics are as smooth as the human skin and are warm to the touch. This might be my subjective opinion but one thing is certain. The texture of his ceramics is the greatest appeal of his work. Just before Shin’s exhibit at Gallery Hyundai, ceramicist Young Jae Lee had an exhibit. Lee displayed ceramics in six unique colors such as dark green, dark brown, and light green. While her modern design and colors were commendable, they were very cold to the touch. In contrast, Shin’s ceramics were warm and smooth and gave a sense of naiveté. .If Lee’s work has a European feel, Shin’s work has a Korean feel. I am not saying one is better than the other. I am just pointing out how different the texture could be despite the similar color. Then why is there this difference? More than anything, it is because Lee has a gas kiln while Shin fires all his work in a wood fire kiln. One is mechanical while the other is natural. Shin probably insists on wood fire kilns not because it is tradition but because if his work was fired in anything else, it would not have this same warm texture. Warmth– this is the most important feature of Korean ceramics. The second feature of Shin’s work is color. He showcased many different colors through his work, demonstrating his broad ability to express himself. Of these colors, green and dark brown are Shin’s colors. Even if it is the same green, there is variation of dark and light, shades and tints. I cannot articulate it in a word but it is the green found in nature like grass. There are also many shades of brown but it is the brown found in nature like the earth. Just as the brown earth and green grass are in perfect harmony in nature, I feel this harmony when I see Shin’s brown and green ceramics together. I hope Shin would delve further into creating green and brown ceramics. I am not saying that he should take a DIS color chart and research each color. As there are many shades and tints of green and brown in nature like the deep brown fertile soil to the light brown sand on the riverbank or the bright green valleys of Gyeongju, I believe that if Shin thinks of these places as he glazes his ceramics, the end product would bring him ever closer to the true color of nature he has been pursuing. I am not saying Shin should battle with the canvas as Hwan Gi Kim did in his work Where Would We Meet as What when he placed the countless dots on the canvas. Rather Shin might let his creativity flow as he thinks of singing birds and the ocean as he “places the dots”. Shin’s ceramics, whether they are green or brown, have a subtle elegant variation in color in each piece. There is a natural harmony between light and dark. There is no tension. This is only possible in a wood fire kiln where this phenomenon is a coincidence but a necessity for color variation. Individual tastes are different. Some enjoy the color variation while others prefer a single tone. But one thing is for sure, this warmth and natural variation is not possible with a machine. It is only possible with someone who follows the principles of nature. Koreans appreciate this warmth. I want to emphasize my point with a few examples. No matter how good they say a pressure rice cooker is, nothing compares to the rice cooked in the large iron pot on the wood fired oven. If this goes back too far in time, it is like the difference between cooking a steak in the microwave and grilling it over a barbecue. The Abundant and Dependable Bowl In order to discuss Gyung Kyun Shin’s world of ceramics, we still need to talk about design and shape. Four factors must be taken into consideration in order to review a ceramics piece: color, texture, pattern or design, and shape. Of these, Shin does not put too much weight on patterns and designs. And it does not seem like he puts much effort into it either. The intriguing color variations are like the pattern so another pattern would actually interfere. I think he may have purposefully avoided patterns. No patterns might be his concept of a pattern. Regarding the shape of his ceramics, there is nothing Shin cannot make and there is no shape he has not made. However, of his pieces, I believe the large bowl is the best representation of his work. Its form gives an abundant and dependable feeling and with its smooth and warm texture, any color would be perfect. Moreover, the large bowl matches Shin’s personality and his creative artistic ability. That is why I see Shin’s uniqueness in the bowl. Shin’s bowl is different from any other ceramicist. First, there are many variations in the finishing. Just as there are variations in the color, there are variations on the surface. There are intriguing ridges on the surface. But there are not forcibly there; it is there naturally, another great appeal. This is probably because he uses a wooden potter’s wheel and it might be the very reason Shin insists on i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a ceramics researcher visited Korea to research how Korean ceramics were so natural. This researcher went to a kiln in a remote part and asked the person turning the potter’s wheel where he might find the master. That potter did not stop turning the wheel but rather just motioned to the interior of the house with his chin. That is when the researcher realized it was the potter’s wheel that gave Korean ceramics their naturalness. It does not start from a perfectly balanced wheel with subsequent efforts to try to give it a natural feel. The ability to give everything up to things that are natural to have a calmness within the soul is the secret of Korean ceramics. Shin’s wooden potter’s wheel has the same effect on his work as the kiln has on the glaze – it controls the result. Shin’s bowls go well with his other pieces. It can be a teapot or a symbolic object. They all go together. This is because of the special feature and appeal of a bowl. It is like a tall pine tree in the yard. It goes well with other plants in the yard. It is like the large white porcelain jar that embraces everything else around it. Many people know the abundant feel of the large white porcelain jars but few know the beauty of the bowl. Whether it is in the East or West or the past or present the basis for all dishes is the bowl. There must be a bowl in order to complete everyday cookware. Despite the changes the bowl has gone through throughout the ages, the large bowl is probably its best representation. Many ceramicists have made large bowls but Shin’s bowls are different from anybody else. And he is able to express it in his many unique colors with his own style. Whether they are white, green, or brown, they all have abundance and warmth. That is why if anyone asks me to summarize Shin’s ceramics, I would say it is the world of warm and abundant bowls.
  1. 연 혁
  2. 중광스님
  3. 1934
    일본 오사카 출생
    1979
    랭커스터 교수의〈The Mad Monk〉에서 ‘한국의 피카소’로 소개
    2002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 토굴 벙어리 절간에 입적
신참봉, 신경균 도예가
나는 병에 걸려, 병을 낫게 하려고 장안사 아래 도예가 신경균의 장안요(長安窯)에서 3개월간 있었다. 신경균과 그의 조수 한 사람, 중광 땡초 - 세 사람과 개 두 마리, 다섯 식구가 살았다. 나는 병을 낫게 하려고 있는 정성을 다했다. 병을 치료하는 데는 정성과 노력,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정직해야 한다. 나는 그 때 깨달았다. 정확한 말이다. 약값은 통도사 주지 태흥 스님이 주시고, 중광 스님 잘 모시라고 신경균에게도 주셨다. 태흥 스님 만나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절로 나고 안정되어, 병이 절로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있는 방 옆에 닭장이 있었는데, 신경균이 토종 닭 세 마리와 큰 거위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불면증으로 잠을 못 자고 시달렸다. 밤새 잠을 못 자다가 새벽잠이 들 만하면 닭이 날개를 퍼덕이며 회를 치고, 큰 거위가 허스키하게 ‘꺽꺽’ 노래 부르며 활개를 쳤다. 그래서 나는 영 잠을 못 이루고 큰 고통을 받았다. 나는 참다 못해, 어렵게 신경균에게 말했다. “닭하고 거위 팔아 버리고 개나 기르지, 닭똥 냄새가 나고, 거위는 되게 더러워.” 참으로 염치 없는 말이었다. 내가 떠나면 되는데... 신경균은 그 날로, 이웃집 닭장을 빌려 닭과 거위를 피난시켰다. 닭과 거위는 피난살이 3개월을 했다. 내가 떠난 뒷날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신경균이 말했다. “닭과 거위를 살찌게 잘 키워서 아버님 약 해 드리려 합니다. 살생을 하면 안 되지만, 아버님 약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공손하게 하는 그 말, 참으로 향기로웠다. 그래서 ‘신 참봉’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대단히 부끄럽고 눈물이 났다. ‘신 참봉 군은 무공해 인간이구나.’ 나는 옛날, 설악산 봉정암에서 수도할 때, 어머님이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했다. ‘나는 복이 너무나 없어서 부모님 한 번 제대로 모시지 못했구나.’ 신경균의 효도는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어서 두고두고 감사했다. 신경균의 집 앞에는 바다가 있어서 싱싱한 고기가 나왔다. 고기 낚는 집에서 전화가 온다. 신경균은 좋은 고기가 나면, 양산 신평에 계신 부모님께 꼭 사다 드린다. 그리고 자기는 멸치, 꽁치나 먹는다. 소박하고 검소하다. 내가 신경균의 장안요에 가 있었던 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신경균이 흙을 제대로 만들 줄 알고, 유약도 여러 종류 만들 줄 알고, 유약을 아주 잘 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경균은 그릇을 잘 만든다. 나는 착각할 때가 많았다. 분청사기 그릇을 보고 ‘골동품 좋다’고 하고 보면 신경균의 작품이었다. 몇 번 속았다. 토련기{土練機)도 없다. 발로 흙을 밟는다. 물레도 발 물레이다. 작품을 보면, 세 가지 이상 종류를 다양하게 실험해 본다. 그릇도,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그릇들의 사이즈가 전연 다르다. 무심히 자유자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통자기도 잘 만든다. 전통을 무시하면 창작을 할 수가 없다. 가마는 장작불을 땐다. 우리나라에서 옛날식으로 다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 문경 영남요의 김정옥씨뿐이다. 신경균의 기초 쌓아가는 과정과 정성을 보니, 틀림없이 앞으로 대장인(大匠人)이 될 것 같다. 세상 모든 일은 정성뿐이다. 살아도 정성, 죽어도 정성, 작품을 해도 정성, 작품을 팔아도 정성, 정치도 정성, 도덕도 정성... 즐거운 추억은 생기를 준다. 서울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으로 떠났다. 신경균과 정충영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신경균을 만나면 도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정충영을 만나면 무역 관계의 박식한 이야기를 듣고, 설록차를 만나면 차 이야기를 듣게 되어 대단히 즐겁다. 즐거운 날 차창 밖을 보니, 황금의 벼들이 손에 손에 이삭을 들고 물결처럼 춤을 춘다. 새들은 날아다니며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나는 빨리 부산에 닿고 싶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부지런히 달리는 기차가 느리게만 느껴져, 기차 앞쪽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마음은 벌써 부산역에 닿는다. 다른 한 중광이가 마중 나와 있다. 부산 간월도에 가서 바닷바람 맞으며 김삿갓 소주 한 잔에 싱싱한 광어회 신나게 먹는다. 흰구름이 푸른 바다 위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며 손짓을 한다. 통영 바다로 오라고 유혹의 손짓을 한다. 통영 앞바다 고기가 참 맛있다고 한다. 드디어 기차가 부산에 도착했다. 신경균과 정충영은 나를 붙잡고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다. 부산은 언제 보아도 무뚝뚝한 경상도 사투리가 믿음직하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 없다면 우리 나라가 텅텅 빌 거야.”하고 한바탕 웃었다. 낭만이 하늘부터 땅까지 날아다니고 있었다. 부산 남포동 밤거리를 걷는 젊은 남녀들은 활기가 넘쳤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는 생명감이 넘쳤다. 낭만이 있고 멋이 있었다. 마도로스도 가끔 보였다. 그들은 모두 강물에서 펄쩍펄쩍 뛰는 숭어들 같았다. 남포동 아가씨들은 날씬하고 섹시하다. 부산 냄새가 그 여자들에게서 다 나오는 것 같다. 부산에 갔다 오면 살 맛이 난다. 부산의 인간 냄새와 낭만을 가슴에 한껏 담아와서 벙어리 절간에서 산다.
  1. History
  2. Monk Jung Kwang
  3. 1934
    Born in Osaka, Japan
    1979
    Introduced as “Korea’s Picasso” in The Mad Monk by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Professor Lancaster
    2002
    Passed away in an underground tunnel temple in Gyeonggi Province, Korea
Ceramicist SHIN GYUNG KYUN
I spent three months at Janganyo to recover my health. It was just Gyung Kyun, his assistant, two dogs, and me – a family of five. I devoted every part of me to get well. In order to fight an illness, one needs devotion, effort, and perseverance. And one also needs to be honest. It was during my time at Janganyo when I realized this. There is no doubt about it. Priest Taeheung, the head priest at Tongdo Temple paid for my medicine and he also gave money to Gyung Kyun to pay for my expenses. I always feel very calm and at ease when I see Priest Taeheung, and I feel energized as if I would get well very soon. The room that I stayed in at Janganyo was next to the chicken cage. Gyung Kyun had three chickens and one large goose. At the time, I suffered from insomnia and could not sleep. Not sleeping a wink throughout the night, I would barely fall asleep early in the morning when I would be awakened by the sound of the chickens flapping their wings and the goose gawking. After suffering through many sleepless nights, I said to Gyung Kyun, “Why don’t you sell the chickens and goose and just take care of your dogs? Chickens smell and geese are very dirty.” This was truly a selfish request. The problem would be solved if I just left. That day, Gyung Kyun found refuge for his chickens and goose at a neighbor’s house and that is where they lived for three months. I was later told that he brought them back the day after I left. After sending his fowls away, Gyung Kyun said, “I want to plump up the chickens and goose so that I can use it for medicinal purposes for my father. I know it ’s wrong to slaughter animals but I have no choice.” His polite response was truly moving. As I heard this, it brought tears to my eyes and I was so ashamed of myself. I thought, “Gyung Kyun is a very pure person. ” I lamented many years ago when I heard of my mother ’s death while I was meditating at Mount Sorak ’s Bongjeong Temple. I thought to myself, “I am so unlucky. I cannot even properly take care of my parents.” Gyung Kyun ’s actions were a great lesson to me and I always thanked him for it. The ocean is near Janganyo so there was always fresh fish every day. The fishermen would call Gyung Kyun to tell him of the daily catch. Whenever there was a good catch, Gyung Kyun would send the best to his parents and he would have the smaller fish like mackerel pike and anchovies. He was very simple and frugal. There was a reason why I went to Janganyo. Gyung Kyun knew how to properly mix the clay, make several different glazes, and utilize them very well. That is why Gyung Kyun is so good at making ceramics. There were many times I would take a ceramics piece and comment what a wonderful antique it was and it would be one of Gyung Kyun’s works. This happened several times. Gyung Kyun did not have a clay mixer. He stepped on the clay to knead and mix it. And he only used a wooden potter’s wheel. Gyung Kyun’s works were varied. He always tested at least three different pieces and none of them were the same. This was because he created his pieces as he freely wished. Gyung Kyun was not bound to tradition , yet he was very good at making traditional ceramics. It was as if he knew that he could not be creative if he disregarded tradition. Gyung Kyun also has a traditional wood firing kiln. There are not many ceramicists in Korea that adhere to the old traditional ways of ceramics. I can only think of Jeong Ohk Kim in Mungyeong. When I think of Gyung Kyun carefully building his foundations in the basics, I know that one day he will be a great master of ceramics. Everything in the world is devotion. Devotion to life, death, creating art, selling art, politics, morals… Happy memories bring life. I took a train from Seoul to Busan to meet Gyung Kyun and Choong Young Jeong. I was very excited to meet them because Gyung Kyun tells me all about ceramics while Choong Young imparts his knowledge about world trade, and when we sit down for a cup of green tea, we talk about tea. As I looked out the window on such a jubilant day, the golden rice fields were dancing and undulating like waves. And the birds were happily singing as they flew by. I was getting anxious to hurry up and get to Busan. The train was going as fast as it could but I wanted to run to the front of the train to try to go even faster. My heart was already in Busan. Gyung Kyun would be waiting for me when I arrive. We would go to Ganwoldo to enjoy the sea breeze, fresh flatfish, and soju. The white clouds above the blue ocean would wave at us as they float ed by. It would be as if the clouds were telling us to follow them to the southern sea by Tongyeong. They say the fish from the seas in front of Tongyeong are very delicious. The train finally arrived in Busan. Gyung Kyun, Choong Young, and I talked the night away. The brusque dialect of Busan always gave me a sense of security. I even joked that if we did not have this dialect, the whole of Korea would be empty. You can feel the romance in the air in Busan. The young couples walking in downtown Busan are filled with energy. The sounds of their conversations overflow with life. There is romance and style. I even spot a few sailors. They all seem like life fish flitting around in the river. The women in downtown Busan are all slender and attractive. They seem to be the fragrance of Busan. I feel alive when I go to Busan. And I take in all the smells and romance of Busan into my heart and bring it back to my silent temple.
  1. 연 혁
  2. 이상일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3. 2009~ 2017
    고은사진미술관 관장
    2015~
    백제예술대학 사진과 겸임교수
몇 해 전, 벚꽃이 의식의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던 어느 날 신경균을 처음 만났다.
그 날, ‘장안요’의 하루해는 너무나 짧았으며 그 짧은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려보고자 했던 무력함을 나의 사진들로 위안받으며, 그 날 이후 ‘장안요’에 대한 끊임없는 내 발걸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 후 많은 시간들이 흐르면서 신경균을 나의 카메라에 담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망은 신경균을 나의 사진적 대상이 아니라 한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현상으로 이어갈 수 있기를 더욱 욕망하면서,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다른 길을 걷는 자의 경지를 넘어서서 어느새 일체감으로 승화되어 가고 있음에 새삼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진정한 도공은 흙 냄새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흙은 인간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그리고 영원성을 상징하는 표상체(表象體)이다. 그의 그릇이 가지고 있는 시공의 일체감이 그의 내공과 자연의 일체감으로 내게 다가온 순간 나는 그가 흙 냄새를 가득 담은 자연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신경균과 그의 그릇을 사진이라는 매체로 과연 어느 만큼 드러낼 수 있을까에 대한 나의 고민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경균에 대한 나의 사진 작업은 그가 구워낸 그릇이 보고, 만지고 사용하는 목적성의 결과물이 아니길 바란다. 그것을 넘어서 하나의 선이요, 형이며 또한 빛으로써 무목적성.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신경균의 절대정신이 불러 세운 대자(對者)로서의 존재, 그 무한성 이기를 소망한다. 신성균에 대한 나의 사진 작업은 그가 구워 낸 그릇이 보고, 만지고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하나의 선이요, 형태이며 또한 빛으로써, 그릇이 아니라 절대정신이 불러 세운 대자(對者)로서의 존재로 드러나기를 욕심한다면 나의 지나친 욕심일까? 2005년 가을에 이 상 일
  1. History
  2. Sang Ill Lee / Documentary Photographer
  3. 2009~ 2017
    Director of GoEun Museum of Photography
    2015~
    Adjunct professor of Paekche Institute of the Arts in photography
I met Kyung Gyun Shin a few years ago when cherry blossoms changed their conscious clothes.
As long time passed, I couldn’t resist expressing him with my camera. Then I desired to meet him not as a photographic object but as an ontological object. This phenomenon may be hard to deny for me. Seeing the same place, we walked down different ways. But soon, we were very surprised to know that we were getting the one. It is said that real potters smell like earth. Earth means the beginning and end of humans and symbolizes eternity. His pottery had the togetherness of time and space. When it came to me, I recognized his works to be nature filled with earth. I could not help but confess how much I showed this world to which he and his pottery belonged with the help from photography. Is it possible that my pictures let his pottery appear not something physical, fired out, touchable, usable but light, a line, a figure able to call absolute spirit? If I want them to do, am I still in his dreams with you? Sang Ill Lee in autumn, 2005
장안요의 새소식
LATEST NEWS OF JANG-AN-YO
[불교신문] 신경균의 그릇
2014.04.14
‘어떤 물건의 주인이란 것은 거기에 손때를 가장 많이 묻힌 사람이라고 한다. 손때 묻은 물건들이 아름다운 것은 손때를 묻힌 사람의 간절함이 묻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산 기장에 있는 장안요의 ‘가마 열기’ 행사에 갔다. 가마에서 갓 나온 덩실한 백옥빛 달항아리를 쓰다듬으며 ‘손때 묻힌 그릇’이 던져주는 행간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됐다.

장안요의 주인 신경균은 그릇 빚기를 시작하면서 우선 발 때부터 묻힌다. 그릇의 원재료인 백토를 반죽하는데 맨발로 이기는 것이다. 밟고 또 밟아 기포없이 곱게 다져지려면 흡사 물지게를 지고 백리길을 걷는 만큼의 발품이 든다고 한다.

반죽된 태토(胎土)는 목물레에 올려져 발로는 하대를 차는 한편 손으로는 사발과 찻잔, 달항아리 등 갖가지 형태의 그릇을 빚어낸다. 그것을 소나무 장작불 가마에 넣어 초벌구이를 만들고 또다시 유약을 발라 섭씨 1300도 이상의 불로 구워내는 것이다. 그렇게 도공의 무수한 손길과 숨결, 땀방울 속에 태어난 까닭인지 신경균의 그릇은 첫눈에도 누구에게나 포근하고도 친숙한 것으로 다가온다.

신경균은 태어날 때부터 도자를 입에 물고 때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선친은 이도다완(井戶茶碗)의 재현으로 유명한 장여(長如) 신정희 선생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필자가 해인사의 자명스님과 함께 통도사 경내에 있던 신정희요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방객이 있는 줄도 모르고 부친의 작업장 한구석에서 맨발로 흙반죽을 하던 봉두난발의 청년이 바로 신경균이었다.

신경균의 그릇전이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 호안 미로 전시장에서 지난달 말부터 열려 한국도자기의 우아함과 자연 친화성을 세계인들에게 알렸다.

세계 195개국 ‘문화대사’들이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각축전을 벌이는 문화 첨병지 유네스코에서 동양의 도예가로서는 스타트를 끊은 신경균의 그릇, 우리도자기의 전통 계승과 도약을 위해 50평생을 매진해온 신경균에게 이번 유네스코 작품전의 쾌거는 사필귀정이라고 해야겠다.

[불교신문3000호/2014년4월9일자]

출처: 불교신문 | 김숙현 | 논설위원·희곡작가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906)
[KBS 뉴스] 유네스코 관람객 사로잡은 한국 도자기
2014.04.02
<앵커 멘트>

우리 도자기가 프랑스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서 전시돼 관람객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세계문화유산을 선정하는 유네스코가 한국 도자기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파리 박상용 특파원입니다.

<리포트>

전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유네스코 195개 회원국 외교관들입니다.

도자기하면 중국과 일본을 떠올리던 이들에게 한국 도자기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인터뷰> 오데트 (프랑스 외교관) : "간결한 멋이 있어요. 그렇지않나요?"

<인터뷰> 게이르만 (스페인 외교관) : "절제된 미가 대단히 아름다운데, 중국의 도자기와 많이 다릅니다."

세계문화유산을 선정해 관리하는 유네스코가 한중일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 도자기를 선택했습니다.

우리 전통 장작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가 갖는 예술성을 인정한 겁니다.

<인터뷰> 캄봉 (기메박물관 수석큐레이터) : "19세기 프랑스를 열광시킨 중국도자기, 1930년대 일본 도자기에 이어 그 자리를 한국 도자기가 이어받을 것 같습니다."

특히 가마에서 구워낸 수십여 개중 하나를 선택하는 창작과정이 평가받았습니다.

<인터뷰> 신경균 (도예가) : "가마에서 꺼냈을때 나오는 느낌이 새 생명이 탄생했을때처럼 평화를 느끼게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도자기의 특징으로 가공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꼽혔습니다.

이번 전시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우리 도자기의 독창성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출처: KBS 뉴스 | 박상용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2837314&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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